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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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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 - 강경애 어머니와 딸 강경애 부엌 뒷대문을 활짝 열고 나오는 옥의 얼굴은 푸석푸석하니 부었다. 그는 사면으로 기웃기웃하여 호미를 찾아들고 울바자 뒤로 돌아가며 기적거린 후 박, 호박, 강냉이 씨를 심는다. 그리고 가볍게 밟는다. 눈동이 따끈따끈하자 콧잔등에 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누구인지 옆구리를 톡톡 친다. 휘끈 돌아보니 복술이가 꼬리를 치면 그에게로 달려든다. 까만 눈을 껌벅이면서…… 옥은 호미를 던지고, “복술이 왔니!” 복술의 잔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멍하니 뒷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 띄는 이끼 돋은 바위 틈에는 파래진 이름 모를 풀포기가 따뜻한 볕과 맑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그 옆으로 돌아가며 봄맞이 아이들의 손에 다 꺾인 나뭇가지에는 노랑꽃, 빨강꽃이 송이송이 피었다. 나비 한 마리가..
윤광호 - 이광수 윤광호 이광수 윤광호(尹光浩)는 동경 K대학 경제과 2학년급의 학생이라. 금년 9월에 학교에서 주는 특대장(特待狀)을 받아가지고 춤을 추다시피 기뻐하였다. 각 신문에 그의 사진이 나고 그의 약력과 찬사도 났다. 유학생간에서도 그가 유학생의 명예(名譽)를 높게 하였다 하여 진정으로 그를 칭찬하고 사랑하였다. 본국에 있는 그의 모친도 특대생이 무엇인지는 모르건마는 아마 대과급제 같은 것이어니 하고 기뻐하였다. 윤광호는 더욱 공부에 열심할 생각이 나고 학교를 졸업하거든 환국(還國)하지 아니하고, 3·4년간 동경에서 연구하여 조선인으로 최초의 박사의 학위를 취하려고 한다. 그는 동기(冬期)방학 중에도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였다. 친구들이 "좀 휴식을 하시오. 너무 공부를 하여서 건강을 해하면 어..
경희 - 나혜석 경희 나혜석 1 “아이구, 무슨 장마가 그렇게 심해요.” 하며 담배를 붙이는 뚱뚱한 마님은 오래간만에 오신 사돈 마님이다. “그러게 말이지요. 심한 장마에 아이들이 병이나 아니 났습니까. 그동안 하인도 한번 못 보냈어요.” 하며 마주앉아 담배를 붙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이마에 주름살이 두어 줄 보이는 마님은 이철원(李鐵原)댁 주인 마님이다. “아이구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나 역시(원문은 ‘역’) 그랬어요. 아이들은 충실하나 어멈이 어째 수일 전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오늘은 일어나 다니는 것을 보고 왔어요.” “어지간히 날이 더워야지요. 조금 잘못하면 병나기가 쉬워요. 그래서 좀 걱정이 되셨겠습니다(원문은 ‘되셨겠습니까?’).” “인제 나았으니까(원문은 ‘나았으니까요’) 마음이 놓여요. 그런데 애기가..
허생전 - 채만식 허생전 채만식 허생(許生)은 오늘도 아침부터 그 초라한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단정히 서안 앞에 앉아 일심으로 글을 읽고 있다. 어제 아침을 멀건 죽 한 보시기로 때우고, 점심은 늘 없어왔거니와 저녁과 오늘 아침을 끓이지 못하였으니, 하루낫 하룻밤이요 꼬바기 세 끼를 굶은 참이었다. 그러니, 시장하긴들 조옴 시장하련마는, 굶기에 단련이 되어 그런지 글에 정신이 쏠리어 그런지, 혹은 참으며 내색을 아니하여 그러는지, 아뭏든 허생은 별로 시장하여 하는 빛이 없고, 글 읽는 소리도 한결같이 낭랑하다. 서울 남산 밑 묵적골이라고 하면, 가난하고 명색 없는 양반 나부랑이와 궁하고 불우한 선비와 이런 사람들만 모여 살기로 예로부터 이름난 동네였다. 집이라는 것은 열이면 열 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초가집이 몇해씩을 이..
광염 소나타 - 김동인 (Gwang Yum Sonata - Kim Dong-in) 광염소나타 김동인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십 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떠한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뿐은 있다―---이만치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白性洙)를 혹은 알벨트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짐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胡某)나 기무라모(木村某)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삼아 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로써,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회(찬스)라 하는 것이 사람을 망하..
B사감과 러브레터 - 현진건 (Thoughts B and Love Letter - Hyun Jin-gun) B사감과 러브레터 현진건 C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 노릇을 하는 B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군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죽은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훨렁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법대로 쪽찌거나 틀어올리지를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어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염소 똥만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앙다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노릴 때엔 기숙생들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치리만큼 그는 엄격하고 매서웠다. 이 B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소위 '러브레터'였다. 여..
지도의 암실 - 이상 (darkroom on map - ideal) 지도의 암실 이상 기인동안잠자고 짧은동안누웠던것이 짧은동안 잠자고 기인동안누웠던그이다 네시에누우면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그리고아홉시에서열시까지리상ㅡ나는리상한우스운사람을아안다 물론나는그에대하여한쪽보려하는 것이거니와ㅡ은그에서 그의하는일을떼어던지는것이다. 태 양이양지짝처럼 내려쪼이는밤에비를퍼붓게하여 그는레인코우트가없으면 그것은어쩌나하여 방을나선다. 이삼모각로도북정거장 좌황포차거 (離三茅閣路到北停車場 坐黃布車去) 어떤방에서그는손가락끝을걸린다 손가락끝은질풍과같이지도위를거읏는데 그는마않은은광을 보았건만의지는걷는것을엄격케한다 왜그는평화를발견하였는지 그에게묻지않고의례한K의바 이블얼굴에그의눈에서나온한조각만의보자기를조각만덮고가버렸다. 옷도그는아니고 그의하는일이라고그는옷에대한귀찮은감정의버릇을늘하루의한번씩벗는것으 로이렇..
도시와 유령 - 이효석 (City and Ghost - Lee Hyo-seok) 도시와 유령 이효석 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인 산골짝 비탈길, 여우의 밥이 다 되어 버린 해골덩이가 똘똘 구르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이 뿌리는 버덩의 다 쓰러져 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에는 흔히 도깨비나 귀신이 나타난다 한다. 그럴 것이다. 고요하고,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칙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곳에서 그런 것을 본 적은 없다. 따라서 그런 것에 관하여서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 나는―자랑이 아니라―더 놀라운 유령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이니 놀랍단 말이다. 나는 그래도 문명을 자랑하는 서울에서 유령을 목격하였다. 거짓말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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